뭐 크게 영양가 있는 내용도 아니라서, 굳이 퍼올 필요까지 있었나 싶지만...
"권인숙"교수가 이런 글을 썼다는게 놀라워서요.
권인숙 교수가 누군지 아시는 분들 많죠? 80년대 말에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해서, 박종철 치사사건과 더불어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을 끌어냈던 분....이후에 미국 유학 가서 여성학으로 학위를 받고 현재 명지대 교수로 재직중이에요.
각설하고, 그녀가 Dramatique에 "권인숙 교수의 드라마 이야기" 칼럼을 계속 쓸 생각인가보네요.
여성주의 시각에서 보면, "궁"이란 드라마는 문제점이 참 많지요.
궁안에서 고정되어 있는 여성캐릭터의 역할을 봐도 그렇고 (시집도 못가는 나인들..어쩔꺼야 -_-), 신이가 채경이에게 주구장창 얘기하는 "법도"도 정말 혈압오르게 만들었지요. 채경이가 궁 안에서의 모순을 느끼고 주체적인 삶을 찾겠다며 뛰쳐나가는 결말 (율이가 그토록 원했던 결말 ㅠ.ㅠ)이었으면 ㅈㄴ 시원했을텐데...
그나저나 제가 관심있게 지켜보던 여성학자가 "궁"을 통쾌하게 씹어주길 바랬는데..
아뿔싸.........................그녀가 "신빠"라니 ㅠ.ㅠ
"신"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끌어들이고, "욕구나 콤플렉스의 문제란 맥락에서 여성을 생각하면 당당하고 독립적 삶이 너무 먼 것만 같아 답답하고 아득하다"라는 나름 여성학자다운 멘트로 끝을 내는데....이보세요, 모든 여성의 문제로 치환하지 마세요~기분나빠집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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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권인숙 교수의 드라마 이야기
<궁>과 신데렐라
한동안 <궁>에 푹 빠져 지냈었다. "요즘 뭘 봐?"라고 친구들이 물을 때 <굿바이 솔로>가 아니라 <궁>이라고 답하면 약간 석연찮아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드라마 보는 수준이 높은 그 친구들에게 <굿바이 솔로>가 더 말이 되는 선택이었고, 노희경 마니아라고 나를 포장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궁>이었다. 공들여 만든 장면이 눈맛을 만족시킨다, 또는 남자들 옷이 너무 예뻐서라고도 해보았다. 그러나 집중력 있게 진행되지 못하고 맥없이 끝나는 갈등구조, 치고 받는 맛이 별로 없어 늘 몇 퍼센트 부족한 대사, 김혜자를 제외하면 약간 김빠진 듯한 연기(특히 윤은혜의 발랄하지 않을 때의 연기), 할 말을 제때 안 해서 생기는 오해로 끌어가는 스토리와 전개방식 등 평소의 나라면 이 중의 하나만을 이유로도 채널을 돌렸어야 마땅했다.
그래도 <궁>만 보았다. <궁>의 여자 시청자 비율이 70%이고 여자 시청자중 30대가 21퍼센트를 차지하며 가장 열심히 보는 층이라고 할 때 나는 그들과 내가 같은 심정일거라고 확신했다. 순전히 황태자 신 때문이었다. 나에게 신은 몹시 매력적이었다. 가슴 가장 밑바닥의 무엇을 끌어 내오는 듯한 매력으로 나를 몰입시켰다.
백마 탄 왕자이기 때문일까? 물론 그는 변형된 왕자인 재벌2세도 아니고 진짜 왕자이다. 그것도 곧 황제가 될 황태자이다. 잘생겼고 옷 잘 입고 키 크고 이 모든 것도 매력의 요소이다. 그러나 내 가슴의 무엇까지 끌어낼 정도는 아니다. 이런 백마 탄 왕자가 어디 한 둘인가. 내 주변에는 없어도 드라마의 세계에서는 무궁무진하게 제공되지 않는가.
드라마의 무수한 백마 탄 왕자급의 캐릭터는 모두 잘생겼고, 신만큼은 아니지만 몸들도 좋고 옷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백마 탄 왕자이기 때문이라면 왜 율은 아니고 신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힘들다. 율도 신만큼 잘생겼고 (솔직히 얼굴은 더 예쁘고) 다른 조건도 떨어지지 않는다. 왕이 될 가능성도 꽤 있었고 원래 태자였다. 나를 포함해 신에게 훨씬 많이 흔들렸던 여성들이, 태자로서의 정당성이 율보다는 신에게 더 있어서 좋아했다고 할 만큼 명분중심형의 사람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율과 신은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었다. 율은 여주인공에 친절하고 자기감정을 표현하는데 무리가 없고, 대화를 잘한다. 소통에 문제가 없다. 겉으로 착하다. 신은 그렇지 않았다. 거칠고, 오만하고, 무례해 여주인공의 자존심을 자주 무너트리곤 한다. 신은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할 줄 몰라서 오해만 낳고 잘 못 푼다.
이 차이가 핵심이다. 여자에게 드라마 속의 남자주인공은 특히 모든 것을 가진 왕자의 경우에는 소통에 문제없는 왕자보다는 소통에 문제가 있는 왕자가 훨씬 더 매력 있다. 소설이나 영화 TV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왕자나 재벌이세 남자는 많은 경우 성격만이 문제였다.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나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다아시는 무뚝뚝하고 감정표현을 할 줄 모르고 그래서 외롭다. <귀여운 여인>의 에드워드(리처드 기어)는 인간적 정서를 잃은 채 냉혹한 기업가의 삶을 살고 있었고, <파리의 여인>의 한기주(박신양)는 태영(김정은)을 만나기 전까지 사랑을 할 줄 몰라 전 부인은 이에 지쳐 떨어져 나간 경우이다.
미국의 로맨스소설인 할리퀸 소설을 백여 권 넘게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재벌급 부자 독신들인데 성격은 다 신과 같았고 기주와 같았다. 한 결 같이 소통능력의 문제를 가진 남자들이다. 이들이 가진 결함은 사랑을 할 줄 모르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고, 일상의 즐거움을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신이와 같이, 이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외로워 보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그리고 냉정해 보이지만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성적이고 뛰어난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어 좋은 사람의 좋은 품성을 (주로 여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알아보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신과 같은 왕자가 율과 같은 왕자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이 완벽한 남성에게 여자도 줄게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가진 왕자에게 평범한 신데렐라 지망생이 줄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일상의 즐거움과 평범한 삶에서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알게 하고 사랑의 문을 열어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잘난 남성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문제, 원천적인 외로움을 극복하게 해준다. 그래야만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성이 평범한 여성을 사랑할 만한 절박한 이유가 생긴다. 소박한 삶의 기쁨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에 새 세계를 열어 준 가치 있는 여성이 된다. 그렇다고 이 여성이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여성의 가치는 왕자가 알아볼 것이다. 신채경은 생긴 대로 행동해도 신은 감동받고 채경에게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한다. 정말로 환타지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치가 증명되고 사랑과 신분상승을 동시에 이룬다. 왕자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에 졸부가 횡재한 듯한 도덕적 열등감은 가질 필요가 없다.
이 환타지는 남성이 가지는 만능인 콤플렉스와 여성의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상호 관계적 환타지이다. 모든 것을 잘해야 하는 남성은 자기에게 그만큼 몰입이 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야만 한다. 관계를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면 만능인의 성취는 가능하지 않다. 목표지향적인 삶 때문에, 신이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서 고고해야만 가치를 발하는 지위 때문에, 이들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성과 자기몰입성을 극복할 수 없다. 반면 신데렐라증후군의 여성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만능인 남성이 싫어하지 않을 정도의 외모와 잘난 남자를 만날 때도 기죽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고집이다. 이 고집은 만능인 남자에게 의미 있게 전달되고 그 남자에게 평범한 삶의 재미를 일깨워주면서 가치를 발하고 신분변신이 이루어질 때 콤플렉스는 만개하면서 절정을 맞본다.
신의 매력은 나의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해주었다. 이 콤플렉스가 현실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은 환타지적 요소로 가득 차있음도 다시 알게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적인 환타지의 즐거움이 드라마 세계에만 머물 수 없기에, 욕구나 콤플렉스의 문제란 맥락에서 여성을 생각하면 당당하고 독립적 삶이 너무 먼 것만 같아 답답하고 아득하다. / 글 권인숙(명지대 인문교양학과 교수)
http://dramamob.com/Review/View.asp?PKId=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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