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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의 독립시대] 식물성 미남, 궁 밖을 걸어나오다
[2006-06-12 00:00]
한국 아이돌 역사 10년, 각자의 길을 걷는 아이들
궁 안으로 들어온 신데렐라는 행복할까, 불행할까. MBC <궁>에서 채경은 모두의 선망을 받는 황태자비가 되지만, 그의 궁에서의 생활은 동화의 그것과 달랐다. 궁은 그에게 마음대로 신발조차 벗지 못하게 하는 곳이었고, 19세 소녀가 할 수 있는 실수도 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걸린 일이 된다. 비록 냉소적인 미남과 밝은 여주인공, 그리고 악녀라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의 설정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궁>은 신분 상승이 곧 행복이라던 트렌디 드라마의 세계관 대신,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충돌이 빚어내는 독특한 감수성을 제시했다.
누가 보기에도 행복할 자리도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자신이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생기는 슬픔과, 그때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은 그 절실한 감정의 깊이가 <궁>을 다른 트렌디 드라마와 차별화시킬 수 있었다. 율은 그 궁 안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에 궁의 무게를 이겨냈다. 궁에서 쫓겨난 뒤 오직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어머니를 위해 황제가 되고 싶어 했던 이 소년은 결국 자신의 말 한마디에 궁의 운명이 걸린 그 순간, 처음으로 어머니의 뜻을 저버린다. 오직 사랑받고 싶어서,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 위해 황제가 되고 싶어 했던 소년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채경을 연모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그 순간은 아이들이 궁의 세계에 거둔 유일한 승리였다. 타인은 원하지만 내가 원치 않는 것, 타인은 이해할 수 없으나 나 자신이 원하는 것. 그 중 진짜 행복은 무엇일까. 그건 곧 율을 연기했던 김정훈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웃기만 하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왜 연예인이 됐냐”고 물었다
김정훈이 속해 있던 UN은 단 한 번도 최고였던 적은 없었고, 김정훈은 잘생기고 잘 웃는 아이돌 스타라는 것 외에 이렇다 할 이미지도 없었다. 그는 또래의 아이돌 스타들처럼 무대에서 아크로바트에 가까운 춤을 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도 않았고, 오락 프로그램에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 개인기를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도 그에게 왜 웃기만 하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왜 연예인이 됐냐”고 물었다. 서울대 치의예과의 학벌을 가진 꽃미남 아이돌은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충분했고, 그는 그렇게 웃으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연예계에서 자기 위치를 가질 수 있었다. 아이돌 연예인으로는 단 한 번도 톱이 되지 못했지만, 가장 탄탄한 미래를 가진 아이돌이기에 아이러니하게 굳이 1위를 할 필요는 없는 연예인. 사람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의 여유를 보고 즐거워했다.
<궁> 출연 이후 그에게 붙여진 ‘식물성 미남’이라는 별명은 능동적이지 않은 율의 캐릭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가져온 이미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뭔가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세상엔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며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예쁜 관상용 식물 같은 존재. 그래서 그는 지금 그의 또래 아이돌 연예인들이 겪는 고민에서 열외된 것처럼 보였다.
90년대 후반 그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거의 모든 ‘평범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은 또 한 번 고민의 시기를 맞이해야 했다. 아이돌이 가요계를 지배하면서 음반시장이 급격하게 팽창하던 그 시절, 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얼굴이나 노래, 춤 솜씨 하나만 믿고 기획사의 문을 두드렸고, 때론 불과 몇 개월 만에 무대로 올라 순식간에 톱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자본을 쌓은 기획사들은 이제 고교생을 바로 데뷔시키는 대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중학생, 혹은 초등학생을 모두 끌어와 지금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르친다. 그들은 음반시장이 몰락하고, 대신 버라이어티 쇼와 드라마가, 그리고 한류가 새로운 인기 상품이 된 요즘 시대에 최적화 된 연예인이 될 수 있도록 ‘조기교육’을 받는 기획사의 ‘엘리트 사원’이다.
20대 후반에 이른 청소년 벤처, 이제 그들은 뭘 해야 하나?
반면 데뷔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앞으로 달려온 과거의 ‘청소년 벤처’들은 20대에 이른 지금 자신의 진로를 두고 고민해야 한다. 시대는 바뀌었고, HOT나 god처럼 일세를 풍미했던 아이돌이 아닌 다음에야 그들에게 남은 건 약간의 인지도뿐이다. 대체 뭘 해야 하나. 연기? MC? 아니면 아예 사업을 할까? 마치 율처럼, 김정훈은 스스로 고생이 훤히 보이는 고민 속으로 들어갔다.
UN은 해체됐고, 전속계약은 끝났다. 그리고, 그는 서울대 치의예과를 자퇴하고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식물성 미남이어도 될 여유를 없앴다. 아이러니하게도, <궁>에서 자기 의지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율은 김정훈이 가장 적극적으로 다가선 캐릭터였다. 그는 율을 그저 잘 웃는 만화 주인공 같은 ‘식물성 미남’ 대신 평생 하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없었던 남자가 드디어 무언가를 찾는 사람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김정훈은 타인의 의지에 따라 살던 자신과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율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거울을 바라보며 이상의 시를 읊는 율의 모습을 제안했고, 처음으로 잘 웃고, 누구에게나 착한 모습 대신 시니컬하고 분노하는 표정을 얼굴에 담았다. 그리고, <궁>이 끝난 뒤 출연한 KBS <드라마시티>의 ‘안개시정거리’에서는 처음으로 꽃미남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별 볼일 없는 잡지사 기자 윤수를 연기하며 ‘모두에게 평범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윗사람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타인이 보기에 가진 자의 여유를 즐기는 것처럼만 보였던 꽃미남 아이돌은 스스로 그 자리를 버리고 여유를 가질 수 없는 경쟁의 세계를 선택했다.
모든 걸 잃었으되 하고 싶은 것을 알게 된 남자
물론, 그의 노력이 그의 연기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궁>에서 그의 연기는 미묘한 표정 변화로 그의 ‘백합갤러’(김정훈의 사진과 글을 올릴 수 있는 디씨 인사이드의 ‘김정훈 갤러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들을 열광시키는 몇 번의 빛나는 순간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도 인정하듯 그 외의 연기는 일정한 수준에 올랐다고 하기 어려울 만큼 어색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배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른 또래의 아이돌 그룹 출신 연기자들이 그토록 절실히 원하고 도전하던 것을 이제야 시작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가 이대로 평범한 연예인에 머문다 해도 그것이 김정훈이란 사람의 인생에 있어 불행한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모든 걸 가졌으되 하고 싶은 것,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가질 수 없었던 율보다 모든 걸 잃게 됐으되 하고 싶은 것을 알게 된 율이 불행했다고 말할 수 없듯, 모든 걸 가진 식물성 미남 김정훈보다 지금의 김정훈이 불행할 이유는 어디 있을까. 그는 이제 남들이 생각하는 김정훈의 이미지에 묶여 사람들 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는 대신 편하게 담배를 피고, 기분 나쁜 사람에겐 냉소를 보낼 수도 있으며, 되든 안 되든 ‘적성에 맞지 않는’ 서울대 치의예과 학생 대신 하고 싶은 중앙대 연영과 학생으로 살아간다.
여유 없는 경쟁, 어정쩡한 위치, 불확실한 미래.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은 어떤 가치를 가진 것일까. 기획사가 보여주는 세계만이 전부였던 시절을 지나 이제 연예계 바깥의 세계까지 생각해야 하는 나이.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더 이상 예쁘게 서 있는 것만으로는 살아남지 못할 정글에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무언가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물일곱의 식물성 미남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하는 어른이 되려면 말이다.
글 : 강명석 사진 : 백가현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view.php?mm=013002001&article_id=39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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