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 리뷰 3부작의 첫 번째 글입니다.
두 번째는 ‘궁’에 대한 작품 리뷰, 세 번째는 ‘궁’의 음악에 관한 리뷰가 올라갑니다.
언제 다 완성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이 글은 ‘궁’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리뷰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율이라는 캐릭터의 프로파일링입니다.
율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살아있다 가정하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의 문제가 무엇이었고,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궁’의 연출/극본의 의도 및 완성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안쓰러운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 22회까지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썼습니다.
드라마 리뷰라면 모든 내용을 전제로 해야겠지만,
이런 글에서 굳이 마지막 두회를 거론해야할 필요는 느끼지 못하겠군요.
거울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속의 나를 진찰하고 근심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 이율, 〈궁〉 7회
아무리 극본이 엉망이어도, 드라마가 그를 정신이상자에 가까운 집착적인 남자로 만들었다 해도
나는 이 아이를 놓을 수 없었다.
거울을 보는 순간조차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아이란,
어른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애틋함을 가지게 만든다.
왜 너는 그렇게 지독하게 널 사랑하지 못하는 거니.
그는 거울 속의 나를 나 자신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거울 속의 나 역시
현실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모두에게 친절한 계승 서열 2위의 의성대군,
신이로부터 황태자의 지위와 채경을 빼앗길 원하는 소년 이율.
이 아이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긍정하고 통합하며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는 걸 모른다.
그가 두 모습을 모두 긍정할 수 있었다면 그는 위선적이긴 해도 그것들을 위하여
더욱 맹렬하게 달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쪽도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는 거울 속의 나를 “진찰하고 근심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또 꽤 닮은” 나일뿐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진실된 모습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오직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홀로 있을 때의 나와 타인과 함께 있을 때로 분리된
나만이 존재한다.
율이 독백을 하는 동안, 신 역시 채경의 본가에서 거울을 본다.
하지만 그는 거울 속의 나에 대한 고민 따위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씨익 웃고 말 뿐이다.
그는 진짜 내가 누군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율과 신을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다.
한 명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거울을 통해 자신을 한 번 더 긍정한다.
그 차이는 두 사람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장과정에서 시작된다.
율과 신은 모두 누군가의 진실 된 사랑을 절실하게 원한다.
그들은 모두 어머니의 영향력 하에서 자랐다. 율은 아버지가 없고,
신에게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황제’다.
황제가 신과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공적인 업무에 관한 것이고,
황제는 늘 신의 능력에 대해 고민한다.
심지어 그는 자기 친아들인 현재의 황태자 이신보다,
조카인 의성대군 이율이 다음 황제로 더 적합한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
늘 신의 안위에 대해 먼저 걱정하고 이로 인해 혜정전과 대립하는 것은 황제가 아닌 황후다.
그러나 황후는 그 마음을 신에게 좀처럼 표현하지 못한다.
그는 신에게 끊임없이 황태자의 품위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촌스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신이 수없이 많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압박감을 느끼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가 원하는 건 ‘엄마’의 따스한 사랑이지만, 그는 황후를 엄마라고조차 부르지 못한다.
“처음으로 나도 원하는 게 생겼어. 그게 바로 그애야.” ― 이율, 〈궁〉 14회
아버지의 부재와 아들에게 ‘야망’을 가르치는 어머니. 당연히 신과 율은 살갑게 다가오는 사람,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보일 사람을 원한다.
이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온 사람을 사랑한다.
부모에게서조차 충분한 애정 표현을 받지 못한 그들은 궁이라는 벽을 뚫고 자신에게 다가서는
존재에 약하다. 그래서 두 남자는 동시에 채경을 사랑한다.
황족인 그들이 누굴 사랑할 수 있겠는가.
궁 안의 여자들은 자신들을 황족으로 대접할 뿐 마음을 보여주지 않고, 궁 밖의 여자들은
자신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동경할 뿐이다.
오직 두 세계에 걸쳐져 있는 채경만이 궁 안에서 궁 밖의 여자들처럼 상대방에게 솔직한 감정
표현을 한다.
만약 이신과 이율이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채 지금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바깥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같은 학교의 신채경이란 여자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오직 채경밖에 없다.
그러나 상반된 두 사람의 가정환경과 황태자와 의성대군이라는 두 사람의 위치는
그들이 채경에게, 혹은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택하는 방법을 다르게 한다.
신이 아무리 외로워도, 그는 황태자다. 그가 거부하든 받아들이든,
그는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역시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걸 알고 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고, 스스로 자신의 언행을 평가하게 된다.
또한 그는 비록 친근한 관계는 아닐지라도 아버지가 존재한다.
그는 끊임없이 아버지에 의해 자신의 능력을 평가당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한다.
신에게 황제는 롤모델이자 극복해야 할 라이벌이다.
그가 아버지와 혜정전의 과거를 알고 그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인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때문은 아니다.
그건 친아버지의 흠결만이 아닌 바로 그를 목표로 살아왔던 자기 자신을 욕보이게 하는 일이었다.
신이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닫아놓은 척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도록 교육받아 왔고, 자신이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특히 그가 효린과 사귄 경험은 그가 황태자가 아닌 한 남자로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는 가출한 상태에서 황태자가 아니라 한 남자로 효린에게 다가갔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이신이 효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하는 모습을 보라.
그는 타인에게 보여줘야 할 황태자의 모습과, 친구들 사이에서 드러내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구분하며,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는 사람들에게 황태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봐줄 것을 요구한다.
너는 내가 황태자라는 걸 알고 있지. 그래서 친절하게 대할 거야. 나도 그걸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너에게 다가가지 못해. 그래도 네가 다가서길 원한다면 싸가지 없는 척, 냉정한 척 하는
나를 뚫고 들어와. 제발. 그럼 난 너를 사랑하겠어. 그리고, 그는 정말 자신의 위악적인 성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그것에 상처 입은 모습도 그대로 드러내는 채경을 사랑한다.
그러나, 율은 사랑받기 위해서 자신을 내던지다시피 해야 한다.
그의 관계는 철저하게 타인에게 종속된다. 황족이기만 해도 타인과 격리된 삶을 산다.
그런데 율은 부모님의 문제로 인해 쫓겨나듯 외국으로 가서 살았다.
누구도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오직 그를 품에 아는 것은 어머니 뿐이다.
그가 어머니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산 것은 단지 단 둘이 산 모자 관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율이 궁에서 나온 어린 시절부터 14년 뒤 다시 궁에 들어오게 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 이가 혜정전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애초에 황태자가 되길 원한 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바람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어머니밖에 없으니까.
내가 황태자 자리를 되찾는 게 어머니의 가장 큰 소원이니까.
그리고 나는……, 날 사랑해 주는 단 하나의 사람인 그를 기쁘게 하고 싶으니까.
“버려진 황족만큼 비참하고 쓸쓸한 사람도 없을 거야.” ― 이율, 〈궁〉 14회
황족이면서도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고, 자신을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어머니일 때,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핏줄로 이어진 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구도 날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비하와
평생 이렇게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만약 그가 30대 초반이 되어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다면 그는 일을 통해,
그리고 그 자신의 능력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와의 접촉도 어려운 곳에서 사는, 천재가 아닌 19세의 소년이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황족이란 신분은 허울뿐인 명예다.
황권의 문제에서 한 발짝 비켜선 혜명공주는 차라리 여유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그는 황제가 될 꿈을 꾸지 않아도 되고, 비교 대상도 없는 ‘공주님’이기에 황제의 조언자 역할에
충실하며 자기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율은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지만 누구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가 신과 학교에서 만나는 순간을 보라. 매스컴의 모든 카메라는 이신을 향하고,
이율은 인파에 파묻힌 채 신을 바라본다. 그게 2위의 숙명이다.
차라리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그는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친절한 성격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궁은 오직 황제와 황태자만을 추종한다.
‘황태자’는 그 신분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의성대군’은 그저 호기심이나
존중의 대상일 뿐이다.
그가 신과 채경의 친영례에 참석하지 않고 한적한 궁의 어느 곳에서 홀로 서 있는 것은
그가 번잡함보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그곳에 갔을 때 또다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외로워도 혼자 있는 것이 낫다.
물론 율이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할 수도 있다.
비록 악인이 된다 하더라도 그가 황태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진정으로 비열한 악인이 된다면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타인에 의해 그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모두 타인에 의해 이뤄졌다.
아버지가 죽어 황태자에서 의성대군이 됐고, 성조에 의해 어머니와 영국으로 쫓겨났으며,
14년이 흘러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현 황제의 결정에 의한 효열 황태자의 추존으로 다시 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인생을 살아온 소년은 자신이 그 스스로 무엇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율은 ‘착한 남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는 설마 자신이 자신만의 장점이나 매력으로 인해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누구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 없듯,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율은 혜정전이 자신의 어머니이기에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계승서열 2위의 황족이기 때문에 자기를 대우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는 황태자가 아니다. 황태자는 어떤 행동을 한든지 주목받을 수밖에 없지만,
율은 궁 안의 사람들이 그에게 일부러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있어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들의 관심이 없으면 율은 ‘내가 나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언제나 좋은 사람, 언제나 남의 생각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다.
뛰어난 외모에 친절한 성격을 가진 계승서열 2위의 황족이란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다. 하지만 율의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그가 친절한 남자일 수 있는 것은 정말로 티끌 없이 맑고 밝은 남자라서가 아니다.
그의 내면에는 거울을 보며 나와 거울 속의 나 사이에서 고민하는 어두운 모습이 숨어 있다.
그는 겉으로 자신의 어떤 모습도 진정한 ‘나’라고 인정하지 못한다.
혼자 있을 때의 나는 타인이 바라는 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들이 좋아하는 나의 모습은
나를 속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분리한다.
그리고 서로 그들을 바라본다.
모두 나이지만, 그 어느 것도 나일 수 없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본 적이 없었고, 아무도 나에게 손을 뻗지 않았어.
그런데 넌,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줬어.” ― 이율, 〈궁〉 14회
채경은 율이 숨기고 싶어 하는, 그러나 제발 알아주길 바라는 그 부분을 곧바로 파고들었다.
율과 신이 동시에 말에서 떨어졌을 때, 채경은 율에게 달려간다.
드라마가 보여 주고자 한 것은 그에 질투하는 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아닌 진짜 한 인간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때 율이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신에게 이 일은 한 번 화내고, 다시 풀면 그만일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율에게 채경이 다가온 것은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황태자보다 자신에게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채경은 율이 아무도 돌아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채경은 율이 황족이라서, 친절해서 도와준 것이 아니라 다만 혼자 있기 때문에 도와준 것이다.
그것만큼 율이 바라던 것이 어디 있었을까.
율은 처음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웅크린 자신의 모습을 내보일 사람을 찾았다.
특히 채경은 율의 신분을 모른 상태에서 그와 친해졌다.
다른 학생들이 그의 외모를 보고 ‘멀리서’ 환호하기만 할 때, 채경은 율의 앞으로 다가왔다.
황인뢰 감독이 채경과 율의 손가락이 맞닿는 장면을 클로즈업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율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접촉’한 여자를 만난 것이다.
게다가 채경은 황태자비다.
만약 채경이 자신에게 온다면, 그건 좋은 남자 이율, 황위계승 서열 2위의 황족 이율이 아닌
그냥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채경은 현재 지구상에서 율이란 존재를 증명해 주고, 그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영상으로 보여주는 율의 심리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대본 때문에 결국 전형적인
스토리처럼 흘러갔지만, 어느 순간 악역 노릇을 한 율의 마음은 그래서 가슴 아프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이 떠난다 해도 버틸 수 있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마음 밑바닥에 깔린 욕망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율처럼 상대방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할 수도 있다.
그가 없으면, 이 세상도 없는 것이고, 이 세상이 없으면 자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어느 순간 황태자의 자리에 보다 능동적으로 집차가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황태자의 자리는 권력 다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채경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사랑받는 사람’의 위치를 의미한다.
이것은 율의 비극적인 한계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에만 몰두할 뿐, 내가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남을 통해 자신을 인정받아야 했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모습만을 보여줬다.
그에게 중요한 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었지,
자신이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불행하게도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떠먹여 주는 밥만 먹고, 그것이 맛있는 음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이처럼
자신이 능동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다가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이것이 정말 사랑인지 알 수 없고, 혹시 그렇다 해도
그 사람에게 다가선다는 것 자체가 두렵다.
만약 저 사람이 나를 거부한다면 어떡하지?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다가도 ‘거울 속의 나’를 발견하고 나로부터 도망간다면?
그는 진정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보다,
나의 완벽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전부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을 알고도 그 사람이 좋아서 다가서지만,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스스로 느끼기 힘들었던 율은 오직 자신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일까만을 생각한다.
그가 ‘둘이서 같이 하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효린에게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더욱이 그가 바라는 사랑의 한계는
남이 원하는 것을 해줘서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호감’ 정도였다.
보다 깊은 관계가 되고, 그래서 내 본모습을 알게 되면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겠어.
딱 이 정도까지면 만족해. 내가 친절하게 대하면 저 사람들도 나를 좋아하긴 해주겠지.
그렇기에 율이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려면 그 사람은 율이 보인 친절 이상으로 더 깊게
다가와줄 수 있는 이여야만 한다.
하지만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보여주고 가까이 다가서려 하지 않는데
어떤 타인이 그토록 먼저 진실 되게 마음을 열어 보이겠는가.
그래서 율은 채경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놓쳤다.
사람들이 원하는 걸 해주며 사랑받길 원하는 그는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 앞으로 좀처럼 나서질 못한다.
자신이 끌리고, 상대방이 뭔가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을, 그 행동으로 인해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이다.
채경이 친영례 준비를 위해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 율은 외부와 격리되어 공부하고 있는
채경에겐 달콤한 간식거리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채경에게 직접 그것을 주지 못한다.
채경이 어떤 신분이건 간에, 그가 채경에 대한 호의만을 보여주면서 다가섰다면
아직 신과 낯선 관계였던 채경은 율에게 먼저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 그럴 수 없었다.
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아는 신은 율의 핑계를 대면서 채경에게 다가섰다.
물론 채경은 율에게 고마워한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 남는 건 간식거리를 ‘직접’ 가져온 신이다.
무도회 때도 마찬가지다.
채경의 구두가 벗겨졌을 때 그걸 신겨준 사람은 신이었고,
율은 어딘가 쓸쓸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본다.
황태자와 의성대군, 다가설 수 있는 사람과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의 차이.
“예, 폐하. ……비궁마마를 몹시 연모하고 있습니다.” ― 이율, 〈궁〉21회
내가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결국〈궁〉을 끝까지 놓지 못한 것은
이 드라마가 믿을 수 없이 그 전형적인 사랑받지 못한 좋은 남자가 자신의 한계를 뚫고 나아가는
‘기적적인’ 성장을, 그리하여 소년이 드디어 나 자신을 사랑하여 타인을 사랑하는 그 순간의
엄청난 변화의 순간을 잡아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단 한 걸음을 나가지 못해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좋아하는 사람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그 시점에서 한 발 더 다가서지 못하기에 늘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만을 기다린다.
그는 다가온 사람에게 잘 해주고,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엔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이 결여돼 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그는 늘 집착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나 자신이 정말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인가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궁〉은 놀랍게도 이 아이의 집착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저 대본뿐이었다면, 율의 집착은 결국 율을 악역으로만 만들고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궁〉의 연출은 채경에 대한 율의 집착을 그의 사랑을, 그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기회로 만든다.
집착이 될 정도의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설혹 그 모든 것을 포기할지라도.
그리하여, 율은 채경에 대한 사랑을 통해 타인이 바라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을 분리하고,
나를 위한 사랑을 향해 한 발 다가선다.
혜정전과 율의 종친들은 그에게 황태자가 되길 원하고, 궁의 어른들은 그가 늘 착하게 웃는
의성군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 모두의 바램을 저버린다.
자신의 사회적 성공과 사랑하는 사람 양쪽을 모두 원하는 다른 악역들과 달리,
그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순간을 맞딱뜨린다. 그건 그에 대한 마지막 시험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원하지 못한다.
그 때 〈궁〉은 율에게 너의 마음을 따르라고 응원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를 버릴지라도, 모두가 너의 거울 속의 너를 알고 손가락질 할지라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남자가 되지 말고 너가 원하는 율이 되라고.
그래서 한 발 내딛어 너의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라고.
〈궁〉의 21회는 사랑을 통해 드디어 자신의 성장을 이뤄낸 율이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음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21회의 클라이막스는 신이 채경에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이 아니라,
이율이 황실의 권력자들 앞에서 자신이 황태자비 신채경을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할 때다.
드라마 내내 율의 심리를 깊게 파고들지 못한 대본 때문에 이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율의 고백도 대본상으로는 전형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그러나 황인뢰 감독의 연출과 음악은 이 순간이 곧 이율이라는 한 남자의 인생에 있어
일대 전환기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드라마 내내 피아노를 주조로 차분하게 전개되던 음악은 다시 1회 첫 신에서 등장한
무거운 현악 세션을 기반으로 무겁고 비장한 분위기로 흘러간다.
그리고 율이 자신이 그날 밤 채경과 함께 있었음을 고백하는 순간,
음악은 밝고 리듬감 있게 진행을 바꾼다.
대본은 비극으로 치닫지만, 음악은 작은 승리의 환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율이 “예, 폐하. ……비궁 마마를 몹시 연모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
클라이막스로 올라갔던 음악은 서서히 사라지며 보는 사람의 모든 감각을 클로즈업된 율의 얼굴에
집중하게 만든다.
두려움보다는 차라리 웃음이 어울릴 것 같은 그 차분하면서도 에너지가 담긴 표정은,
이 장면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궁〉의 중심은 황태자 이신이 아니라 드디어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그것을 두려움 없이 행한 이율이었다.
지금까지 나의 운명을 좌우했던 사람들에게 던지는 조용하지만 격렬한 선전포고.
율은 그 전까지 타인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내딛고 보니, 나의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갈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비록 불행으로 이어질지라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사람, 무엇이 사랑인지조차 잘 느끼지 못했던 사람, 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것만으로도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이미지를 충족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상대방에게 모든 걸 맞추려 했던 어떤 사람들은 율의 이 눈물겨운 고백을 보며
다시 한 번 세상으로 뛰어들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금발로 염색한 머리에 늘 밝은 색의 옷을 입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를 보냈던
좋은 남자 이율,
채경을 알게 된 뒤 어두운 옷을 입고 검게 머리를 물들인 채 웃음이 사라진 차가운 표정으로
궁에 파문을 일으킨 이율.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율의 모습일까.
율의 고백이 있기 전, 더 이상 아들의 마음을 막을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된 혜정전의 탄식은
드디어 이 아이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그가 드디어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됐음을 인정하는 승전 선언이다.
“유모, 살다 보면 자식만큼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하더니만, 그 말이 맞나 봐요. 우리 율이한테는
세상에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런 게 세월일까요? 우리 아들이 사랑을 한다네요.
게다가, 황태자비를 사랑한다니.”
그래서 나는 〈궁〉에서 이율이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않기를, 채경과 맺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이에게 친절할 수 있으며 극도의 인내력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
특히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눈높이를 맞추어 편안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19세의 소년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그만의 고귀한 매력이다.
다만 이율에게 부족한 건 이 모든 장점들을 가진 채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한 발 더 나아가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용기뿐이었다. 이제 그는 그것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그가 찾아야 할 것은 ‘그를’ 사랑하게 만들어준 채경이 아니라, 우아하며 강한 인내와
친절함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어울리는 취향과, 그와 조화할 수 있는 공기를 가진
‘그가’ 사랑하는 여자다.
이율이 황태자가 되지 않는다면, 궁에 갇혀 사는 대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며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까지 가질 수 있다면, 그를 사랑할 사람은 세상에 넘치고 넘칠 것이다.
그때 율은 그저 거기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담아, 상대의 두 눈을 보면서
단 한 마디의 말만 하면 될 뿐이다. “당신이 좋아요.”
이율군, 그 때부터 자네는 세상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될 거야.
화를 내도 그게 좋아 나를 울려도 돼 그래
너의 관심을 다 내게로 돌려줘
아무 말이라도 좋아 나를 비웃어도 좋아
너에게만 그래 나의 그대
거울 속에 나
참 못 생겼어
- 이소라, ‘Tears'에서 -
* 율의 팬북 ‘메모리얼 이율’에도 제공됩니다. 원고료는 안받았습니다. 대신 맛있는
떡볶이를 얻어 먹기로 했습니다만.
글 : 강명석(lennonej@freechal.com)
<트리플크라운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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